알랭 드 보통 불안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불안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면서 불안에 떨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극복해야하는 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그저 자기계발서에나 간단하게 설명되어있을 뿐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불안이 어떻게 생기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불안을 극복이 가능한지를 다양한 범주를 나누어서 설명한다. 알랭 드 보통 특유의 박식함으로 '불안함'이라는 심리적 상태를 학술적으로 풀어낸 <불안>은 인간의 심리에 대해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기꺼이 선사한다. 


<불안>에서의 불안함이란 조금 특별하다. 알랭 드 보통이 서술하는 불안은 다양한 불안들 중에 '지위로 인한' 불안이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지위로 인한 불안은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기준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라고 한다. 그는 이 불안이 생기는 원인을 5가지로 분석한다. 

불안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랑 결핍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사회에 배경에 묻히는 것이 아닌 '이름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 사람들로부터 정서적인 관심을 가지고 싶은데 자신이 지위를 잃으면 지위와 함께 정서적인 관심까지 잃을 수 있다는 걱정으로 인해 불안이 생긴다고 한다. 


속물 근성 

속물 근성도 어떻게 보면 사랑 결핍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추구한다. 처음에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해서 소위 말하는 '속물'을 배척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결국 속물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통해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기대

우리랑 동등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성공했을 때, 우린 불안과 불화를 느낀다. 과거 신분제가 존재했을 때, 천민의 삶은 아무리 끔찍했어도 천민들이 양반이 되는 것을 꿈꾸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에 만족하고 살았었다. 하지만 현재 자본주의 시대에 신분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이 동등해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성공하지 못할때, '나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성공할 수 있을꺼야' 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불안은 생겨난다. 


능력주의 

가난이 사람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그 사회가 가난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성공 여부가 신분에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의 인성을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바뀌고 능력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즉 실패한 사람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과거에는 농부가 꼭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사회 유지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본 반면 지금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효용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한 사람은 그만큼 '노력'도 안 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버려 '도덕적'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이런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실패하면 온전히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

열심히 한다고 꼭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다. 재능도 변덕스러울 수 있고 고용주의 변심이나 변덕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또한 세계 경제도 시도때도없이 왔다갔다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불안을 만들어낸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을 생성하는 5가지의 원인을 서술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5가지의 시각 또한 제시한다. 


철학

많은 사람들이 너는 '불명예스럽다'라는 말을 들으면 '난 불명예스러워'라고 생각하고 불안에 떤다. 하지만 철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만약 똑같이 '너는 불명예스럽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일단 그 명제를 '이성'을 통해 그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한다. 만약 참이라면 이를 인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 되겠지만 거짓이라면 그냥 '나는 나에 대한 이미지와 관계없이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랭 드 보통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라고 주장한다. 


예술

예술은 사회의 '표준 렌즈'를 '도덕적 렌즈'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예술은 사람의 공감을 확대하는데 주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가정하자. 흥부와 놀부는 둘 다 똑같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한 재산 분배로 인해 인성이 훌륭한 흥부는 지독한 가난에 떨고, 반면 악독한 놀부는 사치를 부린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예술은 사람들 사이에 팽배했던 능력주의라는 '표준 렌즈'를 잠시나마 '도덕적 렌즈'로 바꿔준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풍자도 마찬가지다. 풍자를 통해 정당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것에 대한 교정을 사회에 촉구하는 것이다. 


정치

상업적 능력주의는 '부와 미덕을 교묘하게 연결시키는 관행을 중단하고,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반드시 죽마를 떼라'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루소는 근대의 상어적 '문명'은 우리의 소박한 상태로부터 떼어냈으며, 우리는 풍요의 세계에서 불안에 사로 잡혀있다라고 주장했다.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인 것이다. 러스틴은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많이 길러내는 나라야말로 부유한 나라이지 실질적인 부의 생산이 많은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아니라고 한다. 능력주의가 당연시 되는 것은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는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편파적인 생각을 사회에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 오죽햇으면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흔한 말들중에 가장 멍청한 말이라는 소리가 나왔겠는가. 이런 이데올로기를 조금이나마 파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사회의 이상들을 바꾸거나 그것들과 씨름해보는 행위를 뜻한다. 


기독교

세속적인 것들보다는 영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기독교는 진실과 사랑을 중요시여긴다. 알랭 드 보통은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예로 든다. 그가 사회적 지위를 열심히 쌓아왔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보험금이나 자신의 이득만 걱정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는 머리가 둔하던지, 똑똑하던지, 돈이 많던지, 적던지, 모두 신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존엄과 자본의 기본적 평등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게된다. 


보헤미안

부헤미안들은 부자를 증오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풍요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서적' 풍요다.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자신의 정서가 풍부해진다면 그것이야 말고 풍요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법을 옹호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위 다섯 가지의 시각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주아한테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헤미안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다. 직장 상사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더라도 예술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열린 사고를 통해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질적으로만 성공하는데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행위. 이런 행위가 항상 성공에 목말라 있고 실패할까봐 벌벌 떠는 우리에게 필요한 행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항상 불안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우리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기꺼이 선물해주고 싶은 책 <불안>은 내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 Recent posts